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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움받을 용기 / 기시미 이치로, 고가 후미타케

♡푸른산책♡ 2018. 2. 17.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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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아들러의 심리학을 이해하기 쉽게 

열등감으로 똘똘뭉친 청년과 철학자와의 대화체로 되어있다.


철학자는 인간은 변할수 있고 세계는 단순하다.

누구나 행복해 질 수 있다고 말한다.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 의미를 부여한 주관적인 세계에 살고 있지.

객관적인 세계에 사는 것이 아니라네.


아는지 모르겠지만 우물물의 온도는 1년 내내 18도를 유지한다네.(나도 확인해 보고 싶다)

이것은 누가 측정하든지 간에 똑같은 객관적인 수치지.

하지만 여름에 마시는 우물물은 차갑게 느껴지고,

겨울에 마시는 우물물은 따뜻하게 느껴진다네.

온도계는 늘 18도를 유지하지만 여름과 겨울에 느끼는 정도가 다른 것이지.

그렇게 느끼는것이 착각이 아니라 우물물이 차갑다거나 따뜻하다고 느낀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네.

주관적인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은 바로 그런 거지.

우리는 '어떻게 보고 있는가'라고 주관에 지배받고 있고 ,자신이 주관에서 벗어날 수 없다네.

지금 자네의 눈에는 세계가 복잡기괴한 혼돈처럼 비춰질 걸세.

하지만 자네가 변한다는 세계는 단순하게 바뀔껄세.

문제는 세계가 어떠한가가 아니라.

자네가 어떠한가 하는 점이네.


선글라스를 끼고 세계를 보고 있는지도 몰라.

그런 상태에서는 세계가 어둡게 보이는것이 당연하지.

그렇지만 선글라스를 벗을 용기가 없는것이지



"자네가 불행한 것은 과거의 환경 탓이 아니네.

그렇다고 능력이 부족해서도 니고

자네에게는 그저 '용기'가 부족한 것 뿐이야."

'행복해질 용기'가 부족한 거지.


"중요한것은 무엇이 주어졌느냐가 아니라

주어진 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이다."

자네가 Y나 다른 누군가가 되고 싶은 것은 

'무엇이 ,주어졌는가'에만 주목하기 때문일세.

그러지 말고 '주어진 것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주목하게나.


열등감은 주관적인 감정이다.

내 키는 155센티미터 일세.

키가 작은것이 이만저만 고민이 아니었네.

남들 만큼만 키가 크면, 딱 20센티만, 아니 10센티만 더 커도 

뭔가 달라지지 않을까. 더 즐거운 인생이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했지.

이런 생각을 친구한테 털어 놓았더니 "쓸대없는 소리" 라고 일축해 버리더군.

뒤이어 그 친구는 이렇게 말했네.

"키는 커서 뭐 하려고? 너는 사람을 편하게 하는 재능이 있잖아."

생각해보니 그렇더군. 체격이 크고 우락부락한 남자는 그 자체로 상배방에게 위압감을 주지.

하지만 나처럼 체구가 작으면 상대방도 경계심을 풀지.

그렇구나, 과연 체구가 작다는 것은 내게도 주변 사람들에게도 괜찮은 일이구나.하고 생각하게 됬지.

가치전환을 하게 된 걸세.

이후로는 키에 관해서 더는 고민하지 않았네.

여기서 155센티미터라는 내 키가 열등하지 않았다는 점일세.

분명히 155센티미터라는 키는 평균보다 작아.

게다가 객관적으로 측정된 숫자라서 언뜻 보면 열등하게 느껴지지.

하지만 문제는 그 키에 내가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어떤 가치를 주느냐 하는 점이지.


인간은 분노를 지어낸다.

청년 어제 오후 커피숍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지나가던 웨이터가 제 상의에 커피를 쏟았어요.

산 지 얼마 안 된, 그것도 단 한벌뿐인 새 옷이었지요.

발끈한 저는 버럭 화를 내고 말았습니다.분노로 이성을 잃고 만거죠.


철학자 자네는 화가 나서 큰 소리를 낸 것이 아닐세.

그저 큰 소리를 내기 위해서 화를 낸 것이지.

다시 말해 큰소리를 내겠다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분노라는 감정을 지어낸 걸세.

일부러 큰 소리를 내지 않고도 말로 설명하면 웨이터는 정중하게 사과했을 테고,

깨끗한 수건으로 닦아주는 등 조치를 취했을 것이네.

아니면 세탁소에 옷을 맡겼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자네는 큰 소리로 화를 냈지. 말로 차근차근 설명하는것이 귀찮아서

저항하지도 않는 상대를 더 값싼 수단으로 굴복시키려고 한 것일세.

그 도구로 분노라는 감정을 동원한 것이고.


변명으로서의 열등 콤플렉스

열등 콤플렉슨는 자신의열등감을 변명거리로 삼기 사작한 상태를 가르킨다네.

구체적으로 "나는 학력이 낮아서 성공할수 없다."라고 하거나

"나는 못생겨서 결혼할 수가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지.

이렇게 일상생활에서 "A라서 B를 할수 없다"

라는 논리를 내세우는 것은 열등감의 범주에서 벗어나 열등 콤플렉스지.

건전한 열등감이란 타인과 비교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이상적인 나'와 비교해서 생기는 것이다.

지금의 나보다 앞서 나가려는 것이야 말로 가치가 있다.


인정욕구를 부정하라

'그 사람"의 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해 살지 말라

타인에게 인정받으려고 할 때, 거의 모든 사람이

'타인의 기대를 만족시키는 것' 을 수단으로 삼네.

적절한 행동을 한다면 칭찬을 받는다는 상벌교육의흐름에 따라서 말이지.

하지만, 가령 업무의 목표 자체가'타인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것'이 되면 그 일을

하기가 괴로울 걸세. 늘 타인의 시선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다른 사람의 평가에 전전긍긍하느라 

'나'라는 존재를 억누를 테니까. 의외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상담을 받으러 오는 내담자 중에 성격이 제멋대로인 사람은 별로 없네.

오히려 타인의 기대, 부모와 선생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애쓰다가 괴로워하지.

쉽게 말해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지 못하는 걸세.

방약무인하게 행동하라는 것이 아닐세. 이를 이해하려면 아들러 심리학의 

'과제의 분리'라는 개념을 알아야 하네.


'과제를 분리'하라

공부하기 싫어하는 아이가 있다고 하세.

수업시간에는 딴청을 부리고,숙제도 하지 않고. 툭하면 교과서를 학교에 두고 오지.

공부하는 것은 아이의 과제이다.

거기에 대고 부모가 "공부해"라고 명령하는 것은 타인의 과제에,

비유하자면 흙투성이 발을 들이미는 행위 일세.

그러면 충돌을 피할 수 없게 되지.

우리는 '이것을 누구의 과제인가? 라는 관점에서 자신의 과제와 타인의

과제를 분리할 필요가 있다.

타인의 과제에는 함부로 침범하지 말라.

너를 위해서 공부를 하라고 부모는 말하지만 부모들은 명백히 자신의 목적

<세상의 이목이나 체면일지도 모르고, 지배욕일지도 모르지>을 만족시키기 위해 행동한다

즉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나를 위해서'이고 그 기만을 알아차렸기에 아이가 반발하는 걸세.

공부에 관해 말하자면, 그것이 본인의 과제라는 것을 알리고, 

만약 본인이 공부하고 싶을때는 언제든 도울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의사를 전하는 거다.

단 아이의 과제에는 함부로 침범하지 말아야 한다.부탁하지도 않았는데 이래라저래라 

잔소리를 해서는 안된다는 거지.

자신을 바꿀수 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


인간관계의 목표는 '공동체 감각'을 향한 것

공동체 감각은 아들러 심리학의 핵심이다.

타인을 친구로 여기고 거기서 '내가 있을 곳을 여기' 라고 느낄수 있는 것이 '공동체 감각'이다.

가정이나 학교,직장,지역사회는 물론이고 국가와 인류 등을 포괄한 전체와 과거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시간 축,나아가서는 동식물과 무생물까지도 공동체에 포함된다.

사회의 최소 단위는 '나와 너'를 기준으로 생각한다.

남에게 어떻게 보이느냐에만 집착하는 삶이야말로 나 이외에는 관심이 없는 

자기중심적인 생활양식이라 한다.

정년퇴직을 하자마자 생기를 잃는 사람이 있다.

회사라는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와 지위도 명함도 이름도 없는 

'그저 평범한 사람이 된다는 것'즉 보통이 되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순식간에 늙는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회사라는 작은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온 것에 불과하다.

보다 큰 공동체 지역 사회나 국가에 속해있고 그곳에서 어떠한 공헌을 할수도 있다.

소속감이란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획득하는 것이다.


칭찬도 하지 말고, 야단도 치지 말라

칭찬 한다는 행위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 능력 없는 사람에게 내리는 평가다.

저녁 식사준비를 돕는 아이에게 엄마가 "엄마를 도와주는 거야?

착하기도 해라."하고 칭찬을 했네.

하지만 남편이 같은 행동을 해도 똑같이 말할 수 있을까?

즉 "장하다" "잘했다" "훌륭하다"라고 칭찬하는 것은 엄마가 아이를 

자기보다 아래로 보고 무의식중에 상하관계를 만들려는 것이다.

아이가 아니라 대등한 파트너가 일을 도와주었다면 "고맙다"  "기쁘다" "도움이 됐다" 

라고 말했을것이다.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온갖 수직관계를 반대하고 모든 인간관계는 수평관계로 만들자고 주장한다.

수평관계에 근거한 지원을  "용기 부여"라고 한다.

칭찬받는 것이 목적이 되면 결국은 타인의 가치관에 맞춰 삶을 선택하게 된다.


스스로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려면

공동체,즉 남에게 영향을 미침으로써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고 느끼는것.

자신이 주관에 따라 '나는 다른 사람에게 공헌하고 있다,고 느끼는 것

타인에게 관심을 갖는것

수평관계를 맺고 용기 부여의 과정을 거치는 것

이는 모두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실감하고 해주고,

돌고 돌아 인생을 살 수 있는 용기를 북돋아 준다.


자기긍정이 아닌 자기수용을 하라

자기긍정이란 하지도 못하면서 "나는 할수 있다",

"나는 강하다"라고 스스로 주문하는 거다.

이는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는 삶의 방식으로 자칫 우월 콤플렉스에 빠질 수 있다.

한편 자기 수용이란 '하지 못한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할수 있을 때까지

앞으로 나가는 것. 

더 쉽게 설명하자면, 60점짜리 자신에게 "이번에는 운이 나빴던 것뿐이야.

진정한 나는 100점 짜리야" 라는 말을 들려주는 것이 자기긍정이다.

반면 60점 짜리 자신을 그대로 60점으로 받아 들이고 "100점에 가까워 지려면 

어떻게 해야 좋을까"라고 방법을 찾는 것이 자기수용이다.


일의 본질은 타인에게 공헌하는 것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를 해주는 것. 공헌 하려는 것. 그것이 '타자공헌'이다.

자기를 희생하고 주변 사람에게 최선을 다 하는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나 행동이 공동체에 유익하다고 생각했을 때에만

 다시 말해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고 여겨질 때에만 

자신의 가치를 실감할수 있다고 말한다.

나를 버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의 가치를 실감하기 위한 행위인 셈이다.

예로 어느 가정에서 저녁식사를 마쳤는데 식탁위에 그릇이 고대로 놓여 있다.

아이들은 각자 방으로 들어가고, 남편은 소파에 앚아 TV를 보고 있다.

아내(나)가 뒷정리를 시작했지.

그런데 가족들은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도와주려는 시늉도 하지 않아. 

그러면 보통은 "왜 도와주지 않는 걸까""왜 나만 일해야 하는 거지?"라고 불만을 갖게 되지.

그럴 때 그릇을 치우면서 '나는 가족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고 생각해보라는 거지.

설령 가족들로부터 '고맙다'라는 말은 듣지 못하더라도 말이야.

남이 내게 무엇을 해주느냐가 아니라, 

내가 남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고 실천해보라는 거다.

그렇게 공헌하고 있음을 느낀다면 눈앞의 현실은 완전히 다른 색채를 띠게 될 거다,

사실 그 순간 짜증을 내면서 설거지를 해봤자 본인도 마음이 불편하고 가족들도 선뜻 다가오지 못할 거다.

반대로 콧노래라도 부르면서 즐겁게 설거지를 하고 있으면 아이들이 팔을 걷어붙일지도 몰라.

적어도 돕기 쉬운 분위기는 만들어 지겠지.

이건 다른 사람을 적이 아니라 친구로 생각하고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인간은 지금, 이 순간부터 행복해질수 있다.

행복이란 공헌감이다.이게 행복의 정의다.


인생이란 찰나의 연속이다

인생이란 어떤 '선'으로 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점의 연속이다.

분필로 그어진 실선을 확대경으로 보면, 선이라고 여겨진것이 실은 연속된 작은 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선처럼 보이는 삶의 점의 연속, 다시 말해 인생이란 찰나(순간)의 연속이다.

'지금' 이라는 찰나의 연속이지.

우리는 '지금, 여기' 를 살아갈 수밖에 없다.

우리의 삶이란 찰나 안에서만 존재한다.이걸 알지 못하는 어른들은 청년들에게 '선'의

인생을 강요하지. 좋은 대학,대기업,안정된 가정 등 이런 선로를 따라가는 것이 

행복한 인생이라면서.그래도 인생은 선이 아니다.


여행을 하는 목적이 뭐지?

예를 들어 자네가 이집트로 여행을 갔네.

그때 자네는 되도록 효율적으로 되도록 빨리 쿠푸 왕의 거대 피라미드에 도착했다가

그대로 최단거리로 돌아올 텐가? 그런 건 여행이라고 부를 수 없지.

집에서 나온 순간, 그 자체가 이미 '여행' 이네.

목적지를 향하는 과정을 포함하여 모든 순간이 여행이야.물론 어떤 사정이 생겨

피라미드에 도착하지 못한다고 해도 여행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네. 

그것이 에네르게이아적 인생이야.

등산에 비유한다면 등산의 목적이 '정상에 오른것'에 있다면 

그것은 키네시스 행위라고 할수 있지.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헬리콥터를 타고 정상에 올랐다가 5분가량 머무르고 다시 

헬리콥터를 타고 내려와도 상관없지. 물론 산 정상에 오르지 못한 경우 그 등산은 실패고,

하지만 목적이 산 정상이 아니라 등산하는 그 자체라면 에네르게이아적 행위라고 할수 있지.

산 정상에 올랐는지는 관계가 없다네.

목표 같은건 없어도 괜찮네. '지금, 여기' 를 진지하게 사는것. 그 자체가 춤일세.

각각의 찰라를 진지하게 살면 '지금 여기'에서 생을 마친다고 해도 불행하다고 할 것까진 없네.

지금 여기를 살지 않고 과거를 보고 미래를 보고 인생 전체에 흐릿한 빛을 비추는것보다는

'지금 여기'에 강렬한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는게 힘이 있다.


인생에 있어 의미 같은 건 없다.

하지만 내가 그 인생에 의미를 줄 수 있다.

내 인생에 의미를 줄 수 있는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밖에 없다.

타인에게 공헌한다는 길잡이 별만 놓치지 않는다면 헤맬 일도 없고 뭘 해도 상관없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에게 미움을 받으며 자유롭게 살면 된다.

세계란 다른 누군가가 바꿔주는 것이 아니라 오리지 '나'의 힘으로만 바뀔수 있다.

세계는 단순하다. 인생 또한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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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미움받을 용기2'를 읽으려다가 그 책이 이미 대출이 되어 '미움받을 용기'를 읽었다.

전자책이라 대출 기간이 길지 않아 설연휴에도 일 끝나고 밤 늦게 까지 읽게 되었다.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까 하고 나도 지금보다 더 행복해 지고 싶은 마음에...

행복해지기 위해선 용기가 필요하다.

타인의 시선에 맞춰 살아간다는건 나의 삶을 사는게 아니다.

나의 삶을 위해선 미움받을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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